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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아침이지만 런던의 공기는 팽팽했다. 영국 국기 유니언 잭을 쳐들고, 희고 붉은 성 조지 십자기를 몸에 두른 무리가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신호 대기 중인 차에서 이따금 “빵빵” 경적이 울렸다. 호응이었다. 템스강 남쪽에서 열리는 ‘영국을 하나로’(Unite the Kingdom) 집회에 가는 게 분명했다.
9월13일, 이날은 인종주의 극우 활동가 토미 로빈슨(본명 스티븐 약슬리레넌)이 대대적인 세 과시를 예고한 터다. 그는 반이민·반무슬림을 내세워 영 집담보대출이자 국 최대의 극우단체 ‘영국수호리그’(EDL)를 창설한 인물이다. 그는 행사 직전 소셜미디어 엑스(X)에 “불이 붙었다. 혁명이 시작됐다”고 썼다.



9월13일 영국 런던에서 영국 국기 유니온 잭과 잉글랜드기 성 조지 십자기를 두른 극우집회 참가자들이 횡단보도 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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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3일 런던에서 열린 반파시즘 집회 참가자들이 “역사를 기억하고 파시즘과 싸우자” 등의 글이 쓰인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맞은편에서 오는 이들은 북쪽의 러셀스퀘어로 저축은행이자 향했다. 혐오와 차별에 반대하고, 극우에 경고하는 ‘반파시즘’ 집회가 예정된 곳이다. ‘인종차별에 맞서자’(Stand up to Racism)가 주최한 맞불집회에 정오 무렵이 되자 5천여명(경찰 추산)이 집결했다. 노동조합, 여성단체, 장애인·반전평화·환경운동 그룹의 깃발이 섞여 있었다.
극우 ‘반이민·반무슬림’ 내세워 선동
새마을금고 적금‘하나로’란 단어가 무색하게 ‘유나이트 더 킹덤’ 집회에는 반이민·반무슬림 구호가 넘쳐났다. 경찰 추산 11만명의 인파 대부분은 중년 남성이고, 남녀 통틀어 백인이 많았다. 집회장소로 올 때부터 캔맥주를 쥐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다가오면 술 냄새가 풍기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행진하며 구호를 외쳤다. “보트를 멈춰라” “우리 세금이 쓰이는데, 왜 한국씨티 백인이 멸시당하나?”
다양한 인종의 꽃밭이었던 런던에서 벌어진 대규모 인종차별 시위는 영국이 빠져든 국민적 ‘우울’의 단면을 보여준다. 물가는 치솟고 소득은 제자리여서 살기 고단한데 무능한 정치는 개혁의 기대를 배신했다. 노동당은 지난해 7월 총선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해 14년 만에 집권했지만 불과 1년여 만에 민심을 잃었다. 겨울 난방비 지원 삭감, 선물 스캔들에 이어 9조4천억원에 이르는 복지예산 삭감은 서민층에 큰 고통을 줬다. 노동당도 보수당도 싫어진 민심은 극우 쪽을 바라본다. 나이절 패라지가 이끄는 ‘영국개혁당’은 최근 여론조사에서 1위로 나온다. 올해 지방선거에서도 약진해, 다음 총선에서 집권을 노려볼 만하다는 전망이 나온다.



9월13일 런던에서 열린 반파시즘 집회 참가자들이 연설을 듣고 있다.


경제 내리막길에 정치 불신 팽배
극우 집회에 나온 평범한 영국인의 얘기를 들어보면,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이후 영국이 계속 내리막이란 열패감이 묻어난다. 현재의 고단함이 클수록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짙어지는 법. 거리도 깨끗했고, 문도 열어놓고 살던 ‘좋은 시절’을 떠올리며, 이렇게 ‘망가진’ 이유를 누군가 속 시원히 말해주길 바란다.
이 틈을 극우의 선동이 파고들었다. 백만명이 넘는 소셜미디어 팔로워를 거느린 로빈슨 같은 이가 계속해서 “이민자와 난민이 문제” “무슬림은 범죄자”라며 혐오와 차별, 폭력을 부추긴다. 가짜뉴스까지 동원한 극우는 올여름 난민과 이민을 가장 큰 정치적 관심사로 밀어 올리는 데 성공했다. 입소스의 8월 여론조사를 보면 영국인 중 48%가 ‘난민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응답했다.
일상에서의 혐오와 차별이 대담해지고 노골화했다. 가디언에 실린 독자편지에서 한 아버지는 혼혈인 딸이 학교에서 “불법 이민자”로 놀림당하고, “칼로 베면 네 몸에서는 카레가 나오니?” 같은 조롱을 겪는다고 하소연했다. 희생양을 만들어 공격하면서 민주주의가 안에서 곪아가는 것은 영국뿐 아니라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여러 나라에서 진행되는 현상이다.



‘반난민’ 맞서 ‘난민 환영’ 시위 맞불
“노 파사란!”(No Pasaran) 러셀스퀘어의 반파시즘 집회에서 연사들이 연설을 마치며 외쳤다. 연단 아래서 같은 목소리의 함성이 일었다.
이 말은 1936년 스페인 내전의 마드리드 공방에서 공화파 진영이 파시스트에 맞서 결의를 다진 구호였다. 이후 반파시즘 시위, 민주화 운동, 인권 운동에서 공동체가 방어해야 할 권리나 자유에 대한 단호한 수호 의지를 나타내는 말이 됐다. “더는 허용하지 않겠다” “여기서 멈춰라”라며 금지선을 긋는 것이다.
단호히 반대하지 않고 인종주의를 방치하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 나치의 홀로코스트가 보여줬다. 다이앤 애벗 의원(노동당)은 “극우는 사회 전체에 위협을 준다. 난민과 무슬림이 첫 타깃이지만 모든 이주자, 흑인, 노조, 그리고 종교적 소수자와 반인종주의자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말했다.
오도된 희생양 만들기의 본질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 ‘인종차별에 맞서자’ 창립자인 웨이먼 베닛은 “인종차별과 파시즘은 어디서 시작되는가?”라고 묻고 “그것은 사회의 최상층에서 온다. 그들은 분리통치를 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고 말했다. 한 집회 참석자가 들고 있던 “작은 보트가 아니라 (부유층의) 초호화 요트가 문제”라는 손팻말은 극우 프로젝트의 계급적 성격을 말하는 듯했다. 유대인 사회주의그룹 활동가인 데이비드 로젠버그는 “파시즘은 정말 어려운 사람에게 잘못된 답을 제시한다. 음식, 직업, 주택 대신 국기와 혐오의 대상을 준다”고 말했다.



9월13일 런던에서 열린 반파시즘 집회 참가자들이 “파시즘을 멈춰라” 등의 글이 쓰인 피켓을 들고 트래펄가 광장 근처를 지나고있다.





9월13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극우집회 참가자들이 트래펄가 광장으로 나와 사자 동상 등에 올라가 있다.


“민주주의 핵심 ‘친절의 힘’을 믿는다”
그런 점에서 좋은 삶의 비전을 제시하고 민생고를 해결하는 게 증오와 분열을 막는 방패라는 목소리도 나왔다. 대학노조연합 깃발을 들고 있던 리처드는 “(복지예산) 삭감과 이익만 추구하는 시스템에 대한 대안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독이 퍼진다”고 말했다. 환경운동단체 ‘지구의 벗’ 활동가인 아사드 레흐만은 “분열의 힘에 대응하는 해법은 더 좋은 미래, 모두가 단결하는 비전”이라며 “녹색 일자리, 더 따뜻한 집, 더 깨끗한 공기, 제대로 된 식사, 이주민과 난민의 존엄, 지역사회가 서로 돕는 미래를 위해 싸우자”고 말했다.



9월13일 런던에서 열린 반파시즘 집회 참가자들이 “파시즘을 멈춰라” 등의 글이 쓰인 피켓을 들고 있다.


혐오·배제와 싸울 때 어떤 가치를 등불로 삼을지 말하는 이도 있었다. 이날 아침 런던 북동부 베드퍼드에서 왔다는 앨런 니트는 “나는 친절의 힘을 믿고, 친절함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주민에 대한) 일부의 우려도 이해하지만 상처나 증오로 대응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영국은 이민자와 난민에게 친절했던 나라였다. 영국 국민 캐릭터 패딩턴 곰은 영국이 난민과 이주자를 따뜻하게 받아들이던 정신을 상징한다. 마이클 본드의 1958년 동화책에서 패딩턴 곰은 페루에서 화재를 겪고 온 난민 어린이이었다. 목에는 ‘이 곰을 돌봐주세요.’라는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작가는 2차 대전 때 홀로코스트를 피해 영국에 당도한 아이들을 기억하며 이 캐릭터를 그려냈다 한다. 역에서 곰을 발견한 브라운 부부는 패딩턴이란 이름을 붙여주고 가족으로 맞아 따뜻이 보살펴 준다. 옥스퍼드에서 온 대니는 “우리가 신념을 갖고 긍정적인 가치에 대해 분명하게 입장을 밝혀야 한다” 고 말했다.



영국을 대표하는 캐릭터 패딩턴 곰인형


‘극우 세력에 맞서는 여성들’ 선봉에
반파시즘 거리행진이 시작됐다. 행렬은 길게 이어져 소호를 지나 의사당이 있는 화이트홀 거리로 향했다. 참가자들은 “우리는 난민을 환영한다” “극우를 멈춰라” “파시스트 사기꾼은 꺼져라”라는 구호를 외쳤다. 극우는 난민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날 시위대의 선봉에 선 것은 ‘극우세력에 맞서는 여성들’의 깃발 아래 서로 팔짱을 낀 여성들이었다. 행렬이 트래펄가 광장 앞 도로에 다다랐을 때 다리를 건너온 극우 쪽 시위대와 마주쳤다. 수적으로 우세한 그들에게 둘러싸인 대치는 경찰을 사이에 두고 저녁까지 이어졌다.
영국은 1930년대 유럽을 휩쓴 파시즘 물결을 시민의 힘으로 막아낸 역사적 기억이 있다. 1936년 10월 런던 케이블 거리에서 5천여명의 오즈월드 모즐리의 영국 파시스트연합이 행진을 시도했으나, 10만명이 넘는 시민이 강하게 막아서 결국 파시즘의 상륙을 막아냈다. 토미 로빈슨의 이날 런던 집회 인파는 극우세력이 총력을 다해 동원한 결과다. 하지만 여름 내내 영국 전역에서 이어진 극우의 반난민 집회에서는 극우 쪽보다 더 많은 시민이 나와서 포용의 목소리를 낼 때가 많았다.



9월13일 런던에서 열린 반파시즘 집회 참가자들이 “노 파사란” 등의 글이 쓰인 피켓을 들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혐오와 배제, 인종주의가 부풀어 올라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시대, 더는 물러서지 않고 공존과 포용, 다양성을 지키겠다는 런던 시민들의 의지가 트래펄가 광장 너머로 울려나갔다.
“노 파사란.”
런던/ 글·사진 이봉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bhlee@hani.co.kr

갈등과 분열, 불신과 혐오로 흔들리는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다시 시민의 신뢰 속에서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까. 한겨레는 오는 10월23일 열리는 제16회 아시아미래포럼의 주제인 ‘민주주의의 미래’를 탐구하려, 미국·유럽·대만 등 세계 곳곳의 민주주의 혁신 현장을 찾았다. 순위투표제와 초당적 협력, 반극우·반차별 시민운동, 디지털 공론장, 시민의회 등 다양한 시도는 민주주의를 되살리고 확장하려는 전선이다. 각국의 실험을 살펴 우리에게 필요한 변화와 과제를 짚어본다.